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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상 속의 블랙홀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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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임해영
  • 등록일 : 2015-06-06
  • 조회수 : 1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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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어쩌다 서예를 한 일이 있었다. 나도 한석봉 이야기는 알고 있었으므로 나름 무게잡고 멋지게 쓰려고 덤벼들었지만 곧 내 이름 석자는 여기저기 끊어지고 찌그러져 버렸고, 이곳저곳 슬쩍슬쩍 땜빵을 덧붙이다보니 어느새 명필 한석봉은 간데없이 사라졌다. 개발새발의 화선지를 집에 들고와 어머니께 보여드리니 그분께서 일갈하여 가로되.

    ' 꼭 김정희의 추사체같구나. '

    그때 나는 김정희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추사 김정희도 동양3국에서 나름 먹어주는 절세의 명필인데, 왜 초등학생이 얼레벌레 땜질한 서체에서 그 이름을 보여야만 했을까?


    추사체

    노자의 도덕경을 보면 꽤 재미있는 말이 나온다.

    大巧若拙, 大邊若訥 크게 교묘한 것은 서툰 것과 같으며(대교약졸),
    달변은 어눌함과 같다(대변약눌).


    역시 노자 어르신답게 사람 바보 만들기 딱 좋은 소리다. 쭈욱 읽다보면 자연스레 교묘한 거나 서툰 거나, 달변가나 말더듬이나 죄다 별 거 아닌 한 여름밤의 꿈이라고 결론이 지어지기 쉬워서 문제지만, 본래 경서란 결론짓기를 포기하고 읽는게 제 맛. 저 두 문장만 보면 왜 갑자기 김정희가 튀어나온 건지 대충 감이 잡힌다.

    노자에 따르자면 모든 것을 다 익힌 김정희는(대교,大巧) 다시 초심으로 돌아온 후 배움의 뒤로 진행함으로서 일견 서툴어 보이는 자(약졸,若拙)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초등학생이 빈 곳을 채우기 위해 조심조심 땜빵한 개발새발체의 끝지점에서 김정희와 마주친 것이고, 또 그런 면에서 볼 때 김정희는 기존의 형식을 타파한 파격변칙의 기수이자 또다른 미의 존재를 발굴해 낸 서예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1980년대 일본의 삽화계를 관통했던 헤타우마(へたうま) 신드롬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그야말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하늘에서 점지한 절세기재가 아닌 이상에야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결국 화려하고 세련된 작화 스킬이나 자랑하다가 매너리즘에 빠져들게 되면서 점점 더 일상의 삶과는 멀어지는 거짓된 예술을 할 수 밖에 없어 지는데, 그럴 바에야 그냥 손 가는 대로 막 그리는게 낫다는 것이 이 신드롬의 요체다.

    이들 헤타우마는 세상 모든 것이 눈에 보이는대로의 의미만이 아닌, 숨겨진 또 하나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데, 이에 따르면 그림을 잘 그린다는 평판도 마찬가지다.

    잘 그리고도, 훌륭한 사람 (우마우마)이 있고 잘 그리지만 어설픈 사람 (우마헤타)이 있다.

    못 그리고도 대단한 작가 (헤타우마)가 있을 수 있고, 못 그리는 데다가 어설프기까지 한 경우 (헤타헤타)도 많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

    물론 배울 것 다 배우고 뒤로 돌아서서 배움의 길을 되짚어 가자는 주장이 아니라 무턱대고 그냥 서툰 척 하면서 그리라는 것, 즉 어차피 안되는 것 차라리 헤타우마나 하자는 것은 배움의 끝을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한 인간들의 얄팍한 선택에 불과하며, 행동이나 사물이 가지는 고유의 의미를 고작 두 개로 압축시킨 것은 이러한 파격을 통하여 당대 일본의 삽화계를 지배하고 있던 형식주의를 최대한 빨리 제거해 버리고 싶었던 이들 헤타우마 매니아들의 안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이 전혀 터무니없는 헛소리는 아니라는 것에 나 역시 동의할 수 있다.




    나의 명원화실 (2008.12) : 이수지



    그렇지 않다면 작가 이수지의 저 거친 선이 주는 묘한 감동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가 이 신드롬의 선두주자였던 유무라 데루히코의 주장을 따른다고는 상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가 느꼈던 것을 이수지 역시 비슷하게 느꼈을 것이라고는 예상할 수 있다.

    이른바 일러스트레이터의 자아성찰과 본질 탐구는 기본적으로 보편성을 전제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보편성을 가벼이 여기는 순수미술가와는 달리 말 한마디 나누어 본 적 없어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


    출근인파로 언제나 만원상태인 지하철을 탄 순간, 비어있는 자리가 눈에 들어온다. 우왕ㅋ굿ㅋ 30분의 단잠을 더 허용받은 은혜로운 아침.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웬 아주머니가 바람처럼 그 자리를 새치기하더니 고개를 떨구고는 잠에 빠진다. 울화가 북받치며 아까 나오는 길에 실수로 문지방을 걷어차 멍이 들었던 새끼발가락이 욱신거리는 것 같다. 내가 그럼 그렇지 젠장, 오늘도 이렇게 지겨운 일상이 시작되는구나!

    하지만 과연 재미가 전혀 없을까? 물론 그건 아니다.

    모름지기 재미란 찾기 나름인 것.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자라면 그것은 잡아서 그려내야 하는 것이다.


    *


    현대인에게 있어 예술이란 바로 이 고난과 역경에서 비롯되는 스트레스의 만화경이나 다름없다. 중세 르네상스 이후, 그러니까 절대군주의 후원에서 벗어나 예술가 개개인이 알아서 먹고 살아야 하는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하면서 작품의 소재와 작가의 감성이 해방된 이후부터 예술이란 열받으면 열받은 대로, 기분 좋으면 기분 좋은 대로 그려버리면 되는 것이 되어 버렸으니까.

    그런데 현대를 사는 예술인이 살아가면서 느낄 수 있는 스트레스는 그리 다양한 종류가 아니란 것에 문제가 있다. 자녀가 학교에서 0점 짜리 시험지를 받아 왔다던가, 배탈이 나서 속이 더부룩하다던가 하는 일상적인(?) 고통부터 중한 병이 났다거나, 돈이 없어 안락한 생활을 누리지 못한다거나, 실연을 경험했다거나 하는 별로 즐겁지 못한 일이 주를 이룬다.

    그런데 이런 걸 가지고 예술을 하자니 뭔가 약간 이상하다. 인간의 본질을 찾는 것같은 대단하고도 거창한 작업을 해야 하는데 도무지 그럴싸한 폼이 나지를 않는다고 할까.

    그래서 예술가들은 감성을 발가벗겨 외압에 대한 체감을 높임으로서 이를 해결한다. 똑같이 넘어져 무릎을 깠더라도, 보통 사람은 무릎을 깠다고 말하고 넘어가지만 예술가는 이를 피를 철철 흘리는 사고로 증폭하여 느끼는 식이다.

    어떻게 말하더라도 이는 결국 하지 않아도 되는 고민까지 찾아가며 함으로서 작품의 소재를 얻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게 전적으로 한심한 짓은 아니다. 뭐든지 마찬가지지만, 이런 일상 역시 고민하며 해부하듯 파헤치다 보면 망외의 소득. 즉 일상의 재미를 찾아내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가 이수지의 작품에는 이런 일상의 고뇌와 재미가 자연스레 살아 드러난다.



    The Rabbit Hole (1) : 이수지




    우리 아들이 그려도 이보다는 낫겠다는 사람 참 많을 것 같다. 그리는데 30분도 걸리지 않았을 것 같은 단순한 그림. 심지어 화폭으로 사용된 종이조차 흔해터진 연습장이라 이게 밑그림으로 끄적인 건지 아니면 전위작품인지 분간조차 할 수 없다.

    이렇게 중학생이 색연필을 휘두른 거란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거친 그림이지만, 바로 그것이 작가가 노리는 우리의 맹점이다. 너무나도 가깝게 느껴지기에 오히려 너무나도 쉬운 공감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 심지어 나조차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라는 예상은, 우스울 정도로 간단하게 작가와 나 사이의 벽을 허물어 버리고 뭐라고 중얼거릴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나를 공감시킨다. 즉, 작가의 일상으로 관객이 빨려 들어간 거다.



    The Rabbit Hole (2) : 이수지



    거기에 그치지 않고 한 술 더 떠, 이 여성은 나름 무엇인지에 열심히 고민 중이다. 처음 보여주었던 나른함도 마찬가지지만 이 충혈된 듯한 눈에 어린 걱정어린 표정은 어쩐지 익숙하기 그지없다. 솔직히 말해서 요즘 사람 치고 이런 고민 안 해 보았던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일차적으로 공감당한 입장에서는 관성의 법칙에 의해 그림이 너무 심각하게 튀지 않는 이상 자연스러운 이차적 공감이 이루어진다.

    저 찌푸린 얼굴이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어 보이는 것은, 실상 우리는 이미 우리의 고민이 실상 무슨 대단한 고민이 아니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공감도 체감도 필요없을 정도로 하찮기에 오히려 공감되는 일상의 고민거리들. 본질이나 근원과는 전혀 상관없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현대인의 고민거리들.

    그러나 어딘가 재미가 서려있다. 이수지 작가의 작품들은 공감이 된다고는 해도 무슨 거울을 보는 듯한 기분나쁨이 아니라, 잘 만들어진 텔레비젼 드라마를 보는 듯한 공감이다. 내가 한 고민이란 바로 이런 거였구나라고 느끼는 순간, 아리스토텔레스가 갈파했던 예술의 기능. 즉 재인식이 일어난다. 내가 느끼는 고민거리가 사실은 이렇게 재미있는 거였구나!



    The Rabbit Hole (4) : 이수지



    이런 일상 속의 재미는 탁자에 번져나가 만들어진 4차원의 토끼굴에서 토끼가 튀어나오며 극대화된다.

    작가 이수지가 서툰 척마저 해 가면서 노렸던 최고의 목표는 바로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우리 모습만을 묘사함으로서 얻을 수 있는 공통된 느낌. 바로 일상에 스며있는 보편성에 약간의 상상을 더하여 만든 재미다.


    *


    사실 이런 일상적인 고민 속의 재미는 찾을 줄 아는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발상의 전환 없이는 찾을 수 없기에 오히려 어려운 것들. 하지만 작가는 참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해결했다. 너무 쉬워 보여서 오히려 어안이 벙벙해 질 지경이지만, 진짜 이게 그렇게 간단할까?

    대답은 No. 막상 따라그려보면 이건 절대 그리 호락호락한 작업이 아니다. 꼬마 니콜라의 삽화로 유명한 장 자크 상페의 그림처럼 누구나 어렵지 않게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그림들이야말로 가장 어려울 수도 있는 것. 이 중학생의 색연필 장난(?)은 흉내내기로 마음먹는 순간 머리가 다 빠질 지경으로 어려워 진다. 왜일까? 당연히 거기엔 이유가 있다. 그것도 두 개나.

    “미발달 수준의 어린아이들은 모두 천재이다. 왜냐하면 사실이 그들을 괴롭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사실이 아이를 괴롭히게 되면, 그때부터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면 말이다.” - 앨리스 닐


    우선 첫번째 이유. 이것은 다년간 공부하고 익혀온 온 각종 스킬을 완전히 몸에 녹여낸 자만이 이룰 수 있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터치를 아무렇게나 확 내리그어 버려도 절대 그림을 망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져야만 가능한 손놀림이라는 이야기인데, 이 확신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한계를 완벽하게 알고 제어할 수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요소로서 수준급 작가와 그렇지 못한 사람을 가르는 척도 중 하나이다.

    게다가 이러한 '서툰 척'의 가면을 쓰려는 결심도 사실 쉬운 일은 못 된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보편성의 벽을 작가는 누구나 그릴 수 있을 것만 같아 보이는 낮은 수준의 스킬로 스스로를 낮춤으로서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히 돌파했지만, 스스로의 작품 수준마저 낮춰보일 위험을 내포한 이러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용기는 절대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번째 이유. 가장 중요할 수도 있는, 이른바 '목적의 문제'다. 이러한 확신은 스스로의 목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무리 그림을 그리는 수단. 즉 손놀림에 대한 확신을 한다 해도 무엇을 그려야 하는지 모른다면 말짱 꽝이다. 무엇을 나타내야 하는지 모르는 작가의 손은 머뭇거리게 될 것이고, 그때는 서툰 척이 아니라 정말 서툰 것이 되어 외면당하고 말 테니까 말이다.

    작가 이수지에게는 강력한 확신이 있다. 그게 없었다면 대담무쌍하게 서툰 척을 감행하여 보편성을 확보할 용기도 내지 못했을 테니까. 그렇다면 어디 있을까. 그다지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이 작가의 확신은 일상의 가벼움을 중시하며,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중히 여기는 것에 있는 것이다.

    이 확신이 어찌나 강하던지, 이미 작가에겐 인간의 본질이나 근원에 대한 탐구 따위는 죄다 공염불처럼 들릴 것이다.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는 것조차 수행의 일환으로 여겼던 구도자의 수행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하지만 무엇을 그린다 한들 작가의 그림에는 이 묘한 일관성이 자리할 것이고, 비록 본인이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작가 이수지는 인간의 본질 가운데 하나를 건드리고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인간의 본질은 결국 그 일상 속에 드러나 있다는 말이 틀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illustwriter
    대남

    1998년 보르도 5대학 D.E.F.L.E
    2000년 파리 발라드 오디오 비쥬엘 상급 예술학교(ESRA-Paris Balade)
    2003년 파리 8대학 조형예술학과 Art Plastique, Universite Paris 8e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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