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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색상 속에 숨긴 연서 (戀書) 윤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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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임해영
  • 등록일 : 2015-06-05
  • 조회수 : 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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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름지기 세상 모든 일에는 예외가 존재하는 법이다. 자신의 내면을 끝없이 응시한 후 외부적인 정보의 유입으로 이룬 깨달음을 덧붙여 자신을 보다 풍부하게 만든 다음 그것을 화폭 위에 쌓아 올리는 것이 바로 작가들이라면, 이 역시 예외가 존재하기 마련.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꿈을 찾아가는 사람도 존재하고 있다.

    그들은 꾸준한 응시로 자신의 내면을 관찰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외부적 정보를 덧붙이기 보다는 해당 정보에 해당하는 부분을 지워나가는 방식을 사용한다. 예컨대 외부적으로 어떤 일을 겪어 자신의 나약함에 실망했다면, 자신의 내면에 서린 나약한 부분을 제거하거나 최소한 보이지 않게 가리는 방식이다.

    이것저것 죄다 삭제시켜 버리면 뭘 그려야 하느냐고 반문하지 말자.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비워 나가는 것도 하나의 훌륭한 방법에 해당하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감성이란 존재의 특성 덕분이다. 감성은 수학적인 계산법이 통용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일단 비우면 그 자리가 텅 비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비워진 그 자리를 바로 대체시켜 나가는 존재다.

    그렇게 해서 이런 식으로 끝없이 지워나가면 어떻게 될까? 처음 얼마 동안은 자기의 모습도 아니고 자기의 그림이 아닌듯, 만족스럽지 못한 모습이 나타나게 되지만 꾸준히 지워나가다 보면 보다 근본적인 것이 드러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자신이 닿고 싶은모습. 소위 말하는 꿈이란 존재다.

    애초에 자신을 관찰하는 목적이란 바로 이것, 자신을 찾아 재구성함으로서 꿈을 찾아내기 위함이 아니던가.그러므로 꿈을 찾는다는 행위를 다른 말로 바꾸면 작품을 제작하는 목적을 찾게 되는 것이다. 모로 가도 서울은 갈 수 있듯이, 이 목적찾기란 이렇게도 가능하다.


    *


    타인들의 꿈 속을 떠돌기 시작한 이래, 나는 한번도 색상에 대한 이야기를 열심히 들춰본 일이 없다. 그것은 그 사람들의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 가운데 색상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들이 색상 자체보다는 무언가 다른 것들을 더 많이 변형함으로서 자신을 나타내려 들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 작가, 윤서희는 그렇지 않았다.


    versus (2009.11.19 ) : 윤서희



    그녀의 그림에서는 원색들이 철저하게 정제된 상태로 춤을 추고 있다. 거의 제거되다싶을 정도로 숨어버린 터치와, 군더더기 하나 없이 뻗어나간 선들은 마치 정제될 대로 정제되어 흡사 판화에서나 느낄 수 있을 것같은 칼맛이 느껴지는데, 일본 판화 우키요에와 인상파 화가의 작품들에서나 맛볼 수 있을 법한 화사한 색채의 파노라마가 그런 느낌을 더해주고 있다.(일본 판화와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 사이에는 상당한 연관이 있다)

    뒤돌아 보지도 않을 것처럼 모든 것을 지워버린 절제된 색채의 향연과 단칼에 강철이라도 잘라버릴듯 가차없이 조정된 선의 조합. 감상하다보면 어딘지 시원한 느낌마저 드는데, 이것은 노란색, 빨간색과 함께 작품의 주조를 이루는 시원한 바닷빛 파란색과 어울려 그지없이 청명하고도 차가와 보이기 때문이다.

    이 뜨겁고도 차가운 매력. 바로 언제부터인가 젊은 층의 사람들에게 문화적 이상향으로 손꼽히는 '쿨'의 깃발이다.

    그런데 내가 보아온 것에 따르면 이 '쿨한 사람'에는 대충 두 가지 부류가 있다. 원래 태어나기를 쿨하게 태어난 사람과, 살다보니 쿨해 진 사람. 태어날 때부터 쿨한 사람은 원래 아무 생각없다, 혹은 화끈하다는 말을 듣고 말 것 같지만 아는 사람은 안다. 내츄럴 본 쿨가이는 엄청나게 드문 법이라는 것을.

    그러니 작가에 국한하여 이야기할 때 쿨하지 못했던 사람이 쿨해졌다고 보는 것이 더 가능성이 높은 셈인데, 덧선이나 터치, 다양한 명암과 구도, 사물의 그림자마저도 지워버린 채 칼날같은 절제만을 앞세우는 작가를 보면 아무래도 그쪽이 더 설득력 있는 셈이다. (게다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면 그런 것을 지울 리가 없지 않겠나!) 살다보니 쿨해졌다고 예상하자. 그렇다면 그것 역시 결국 둘로 나뉘어진다.

    쿨하지도 않은데 쿨한 척 하고 있던지, 아니면 쿨해야만 버틸 수 있을 정도로 마음 고생을 심하게 했던지. 내츄럴 본 쿨이 아니라고 가정한 작가 윤서희는 어느 쪽일까. 진짜 그림에서 받을 수 있는 느낌대로 쿨하게 되어버린 사람일까? 아니면 아직 쿨하지 못하기에 쿨하고 싶어하는 사람일까.

    답은 사실 나와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실제적으로 일상생활에서 이렇게 쿨한 나머지 뒤를 결코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모습 역시 세심하게 돌아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작가로서의 작품 생활을 훌륭하게 이어나가기 힘들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일에 대한 추진력이야 그지없이 좋겠지만, 섬세한 관찰을 골격삼아 끝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확인하다가 그 결과물을 화폭 위에 재구성해 내야 하는 예술가로서는 사실 눈 앞이 캄캄할 지경 아니겠는가.

    따라서 단아한 선으로 쿨한 삶을 전파하는 윤서희 역시 그러한 시간. 즉 쿨하지 못했던 시간을 적어도 한동안은 보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뼈저리게 자신을 돌아보고나서, 삶의 군더더기를 없애고 다시 태어나는 심정으로 스스로의 선을 정리해 나갔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어떻다 한들 그녀는 앞으로 달성하고 싶은 꿈을 찾은 셈이다. 그 덕분에 쿨함에 대한 열망과 개인적 삶에서 받아들인 외부적 정보로 인한 깨달음, 그리고 그로 인한 변화 등은 그녀의 그림에서 군더더기를 잘라내어 마치 칼로 베어놓은 듯한 단아함을 나타내게 되었는데, 반대로 색상은 그 나머지 모든 것을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화사해 지기 시작했다.

    즉 그림 위에서, 그리고 자신의 내면에서 일체의 군더더기를 태워버리고 싶었던 작가는 마치 염산 속에 금괴를 담가 이물질을 제거하는 것처럼 그것들을 제거해 냈고, 그 안에서 산화되지 않고 남은 가장 원초적인 몇가지 감정들만을 남겨둔 셈이 된 거다. 그리고 그것들을 색채로 승화시켜 화폭 위에 현란하게, 하지만 엄정하게 절제시켜 흩날리기 시작했다.



    사랑이 아니어도 괜찮다 (2009.08.22 ) : 윤서희



    그런 감정의 줄기들을 가장 확연하게 나타내어 다른 이에게 전달할 수 있는 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색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서희라는 작가를 알고 싶다면, 그녀가 사용하는 색채는 그 수가 적을 수록 하나도 허투루 보면 안된다는 뜻이 된다.

    작품에 묘사되어 있는 선화들은 무슨 특이한 형태를 띄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강렬한 색상과 어울리면서 오히려 특이해 보인다. 이 절제될 대로 절제되어 단아해 보이기까지 한 선들은 마치 일본의 우키요에 판화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어떤 연극 스틸사진의 한 컷을 연상시킬 정도로 움직임 속에서의 속도감이나 동세가 제어되어 있는 상태이니까.

    화사한 색채를 사용하는 작가들은 거의 예외없이 하나의 숙제에 맞부딫치게 된다. 바로 주된 색채의 설정이다. 무조건 많이 쓰는 색이 주된 색채라는 식의 대답은 정답이 아니다. 가장 눈에 띄이는 색상, 작품의 느낌을 결정짓는 색상이 바로 정답이다. 하지만 사방에서 강렬한 색이 파도치고 있는데 어떻게 주된 색상을 드러낼 것인가?

    3차원으로 돌아가는 현실세계를 그림자마저 삭제 당한 2차원적 평면으로 국한시켜 그림으로서 얻어낸 하나의 연극과도 같은 느낌 속에서, 그리고 모든 것이 절제되어 단순함을 우선시하는 작품의 특성 속에서 무언가를 강조한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선을 유별나게 굵게 쓸 수도 없고, 빨간색이 소중하다면 그만큼 다른 색도 소중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껴버린 작가로서는 한 가지의 색조만을 주조로 삼아 다른 색을 보조적 위치로 격하시키는 것 역시 바라는 바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든 색상 사이에 차별을 두지 못할 경우 원색이 파도치는 작품 전체의 느낌은 혼란에 찌든 난잡함으로 귀결될 뿐이라, 이 순서대로 줄맞춰 주기. 일명 콘트라스트를 맞추는 작업은 결코 넘길 수 없는 중요한 작업이 되었다.

    하지만 마술쇼에서 시선을 확 잡아끄는 불꽃의 분사처럼 그렇지 않아도 시선을 못박아 버리는 원색의 향연 속에서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감추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은 노릇이다. 모든 색을 시선을 못박아 버릴 수 있는 화려한 색을 사용하면서도 의도적으로 그것 중 일부를 가릴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윤서희가 택한 길은 간단했다. 작품 속에서 특정 색상이 주목할 가치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색채의 명암 변화. 즉 색상 속의 그라데이션이다. 2차원적인 평면에서 3차원적인 느낌을 부여받은 색상의 존재. 그것이야말로 그 작품의 명함인 것이다.

    그래서 윤서희가 사용하는 명암이나 채도 변화의 그라데이션은 모든 부분에 걸쳐 철저하게 제한되어 사용된다. 보통 어떤 상황에서도 강조를 받아야 하는 등장인물에 한정하여 사용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자주 눈에 띈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가 당시 표현하고 싶던 감정을 전면에 직접적으로 드러냄으로서, 가지고는 있지만 왠지 감추고 싶었던 감정이나 버리고 싶었던 자신의 모습 마저 슬그머니 나타내되 감출 수 있는 것이다.

    일단 이렇게 관객의 눈을 주목시켜버릴 무언가를 정해 버리고 나면, 그 다음은 손바닥 뒤집기나 마찬가지. 관객의 눈길이 일제히 그 곳으로 쏠리는 순간, 윤서희는 별로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엄연히 자신의 속에 있는 색을 한 쪽에 슬그머니 배치하여 작품 전체의 균형을 맞춤으로서 스스로의 재구성을 완결지어 버리는 것이다.


    *


    두 눈 뻔히 뜬 채로 속을 수 밖에 없는 최상급 마술사의 쇼처럼, 윤서희는 원색에 가까운 강렬한 색상들을 원하는대로 주무르며 자신이 되고 싶었던 모습과 가지고 싶었던 감성을 관객의 속으로 전염시킨다. 관객은 스스로의 꿈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도 적절하게 가림으로서 진솔하지만 미묘한 작품에 감명을 얻고, 윤서희가 이끄는 '단아한 세계의 입장권'을 구입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고 그것에 무언가를 더함이 아니라 빼는 방식으로 정제하여 스스로를 정갈하게 드러내는 것도 풍요로운 내면의 꿈을 드러내는 역설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피타고라스의 논리처럼 세상 모든 것은 수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예술은 결코 수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움으로서 채울 수 있다는 불가의 진리가 성립하는 순간 이렇게 하나 빼기 하나는 제로라는 수학적 진리가 성립하지 않는다.

    아아... 산수를 못해도 예술을 기웃거릴 수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나 고마울 줄이야!


     

     



     

    illustwriter
    대남

    1998년 보르도 5대학 D.E.F.L.E
    2000년 파리 발라드 오디오 비쥬엘 상급 예술학교(ESRA-Paris Balade)
    2003년 파리 8대학 조형예술학과 Art Plastique, Universite Paris 8e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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