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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근은이 부르는 달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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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임해영
  • 등록일 : 2015-06-05
  • 조회수 : 1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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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설 서유기에서는 천축에서 돌아와 각자 해탈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삼장법사에게는 거기가 끝이 아니었다. 그는 천축에 다녀온 뒤부터가 사실 진정한 생고생의 시작이었던 거다.

    산스크리트어로 적힌 경문을 그냥 가져다 놓으면 까막눈이 널린 그 시절 도대체 몇 명이나 그것을 읽을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밤을 낮삼아 경문번역에 매진했는데, 번역작업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은 다들 동의하겠지만 제대로 하면 이것도 코피 터질 일이다. 하여간 삼장법사가 그때 번역한 천축의 경전 가운데 하나가 바로 대반야바라밀다경.

    하지만 귀찮아서 그러셨는지 아니면 힘들어서 그러신 건지 경전을 확 줄여서 요점만 정리하여 전체 270자 문구로 만드시고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라 명명하셨는데, 그 덕분에 경문의 독해 난이도가 확 올라가 버리고 말았다. 쉬운 말로 해탈 시험의 컨닝페이퍼 정도가 세상에 등장한 거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 시..(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 時..)로 시작하는 불경. 어려운 한문 나왔지만 생각보다 어려운 건 아니다. 반야심경은 누구나 한번 쯤은 이 경전의 글귀를 들어보았을 정도로 유명한 경전인데, 예를 들어 아제아제 바라아제라는 영화의 제목은 바로 이 반야심경의 마지막 종장에 등장하는 글귀이고 무슨 에로영화 제목같은 색즉시공 역시 이 경전의 키포인트를 이루는 문단 중 하나다.

    물론 이걸 보고도 해탈할 수는 있지만 그냥 공부하고 말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은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 얼추 예습하고 들어가지 않으면 애매하기 짝이 없다. 아니 불(不)자가 전체 270자 가운데 무려 9회, 없을 무(無)자는 21자, 빌 공(空)자는 7회 열거되었다.

    본문을 읽어보면 무엇은 무엇이다는 식의 표현은 거의 없는 대신 무엇은 무엇이 아니고, 심지어 그 무엇조차 없는데 사실은 그것조차 아니로다 식의 낙동강 오리알 투성이다. 관자재보살께서 행심바라반야밀다 하실 적에 뭘 잘못 드셨나, 왜 이렇게 쓰셨을까.

    반야심경이 이렇게 골 아프기 짝이 없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상상하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훨씬 방대한 내용이 압축되어 있는데, 우등생의 컨닝페이퍼는 원래 분량이 작을 수록 더 어려운 법.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인지라 산에서 수도하며 공부하는 구도자가 아닌 바에야 그걸 제대로 알아내려면 어떤 계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어떠한 계기를 통하여 그것을 알아내게 되면 이른바 달관(達觀) 내지는 통달(通達)이라는 것이 보상으로 주어지는데, 이제 이야기하려는 작가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그만 달관해 버린 예술가이다. 달관당했음을 사방에 드러내는 것을 보니 그의 깨달음은 아직 진정한 의미의 해탈과는 거리가 멀다 할 수 있지만 어차피 예술이란 곧 자랑질. 즉 표현이므로 일면 당연한 노릇이 아닐까.

    그, 바로 이근은이다.



    그래, 가끔은 작업실에 놀러와 (2009,02-창원 아시아 미술제) : 이근은



    우선 이근은은 태생적인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니다. 그는 현직 순수예술가이고, 그의 순수예술작업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그에게 있어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의 경계는 비교적 뚜렷하기에 단편적인 이해는 어렵지 않다. 순수예술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골라낸, 비교적 잘 팔릴 것 같은 그림들이 일러스트레이션의 포트폴리오로 옮겨진 것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단면도를 잘라놓고 전체를 얼버무리기에는 그의 그림에서 풍겨오는 기이한 아우라를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역시 그의 일러스트레이션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정신적 깨달음. 즉 이근은식 예술의 동력 구조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해 보려 해야 한다.

    *

    얼마전 타계한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어울리지도 않는 흰옷을 고집스럽게 일관한 이유는 그의 어린 시절 어머니가 풀을 먹여 다려주었던 흰 옷, 즉 삶의 기억이 그의 마음 깊은 곳에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작가가 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더라도 그려낼 수 있는 모든 것의 기준은 결국 스스로의 삶, 단지 그것 뿐인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의 삶이라는 것은 또한 롤러코스터의 연속이다.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가 있고, 바닥을 칠 때가 있으면 별을 딸 수 있을 정도로 오를 날도 있는 법. 순수예술에서 스스로의 삶을 노래할 때에는 이 모든 것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연작' 같은 것을 만들어내어 관람하는 사람에게 동감과 감동을 줄 수 있지만, 상업예술에서는 아무래도 그럴 수 있는 여지가 많이 좁은 편이다.

    대중은 롤러코스터의 아래로 처박히는 것을 그다지 즐기지 않기 때문이다.



    자화상 - 불안 (99) : 이근은



    이근은의 순수예술작품 가운데 하나인 '자화상'이다. 절대 즐거워보이지 않는 남자가 불안 속에서 두려워하고 있다. 두려움의 대상이 무엇일까. 죽음일 것 같지만 그건 아닐 것이다. 조금이라도 죽음에 직면해 본 사람은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죽음으로서 다가올 고통, 즉 남겨질 자의 아픔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사실 이 그림을 개별적으로 보자면, 나는 이근은의 그림 가운데 그저 그런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특출난 기교도 보이지 않고, 이 정도 수준으로 불안과 그것에서 기인하는 공포를 묘사하는 작가는 널리고 깔렸기 때문이다. 사실 이렇게 대놓고 묘사하지만 않을 뿐이지, 현대 사회에서 이 정도 불안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여기서 놓치기 쉬운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것을 그릴때만 해도 이근은의 그림에 아직은 어떠한 달관한 자의 깨달음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두려움은 그에게 있어 어떠한 깨달음을 줄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할 수 있다. 보통 멀쩡한 사람을 달관시켜버리는 계기는 흔히 가슴 저미는 공포와 고통의 과정이기 쉽기 때문이다.



    구토(99) : 이근은



    불안 다음에 나타난 것은 구토현상이다. 그가 두려워하던 최악의 사태, 그 임팩트의 순간은 고의적으로 연작의 극적 효과를 위해 생략한 것인지 아니면 차마 그려내지 못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큰데, 이 구토 현상이 두려움의 본체가 그의 삶에 닥쳐오기 전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고 예측할 수 있는 이유는 고통을 호소하는 이런 류의 고난 시리즈 후에 바로 침묵 속의 응시, 즉 묵시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묵시에서부터 그의 그림에서 옅은 현기의 후광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묵시 (2000) : 이근은



    그 역시 자책과 자학의 유혹에 시달리기도 했다는 것은 별로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광야에서 고행하던 예수도 피해가지 못했던 그것이 바로 자기학대의 유혹이니까. 이런 자책에 빠지면 그 다음은 굴복과 자기혐오로 발전하기 마련이고 정신은 나락으로 떨어져 건전한 삶이 어려워지지만, 이근은은 그것을 돌파해 냈다.

    그때 그가 그것을 돌파하는데 사용한 것이 바로 겸허다.



    빗소리 (2000) : 이근은



    그는 모든 것을 벗어던진채 겸손한 자세로 스스로를 수그리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 애썼고, 그러한 퀘스트의 보상 아이템으로 무언가 중요한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그가 찾아낸 것이 바로 달관의 동력, 그의 예술을 발광시키는 아우라의 본체이다.



    빛이 스며들다 (2002) : 이근은



    *

    남녀의 성비율이 다르긴 하지만 하여간 교수대에 오르는 죄수 가운데 난동을 부리며 1초라도 더 살아보려고 발악하는 죄수의 비율은 채 1%도 안된다는 통계를 참조하자. 가장 낮은 곳에서 더 이상 지킬 것 없는 자가 스스로 취할 수 있는 가장 겸허한 자세로 다가드는 모든 것을 수용하려는 순간, 그는 속세를 살아가는 필멸자로서 중요한 것 한 가지를 버리게 된다. 바로 집착, 혹은 미련이다.

    심지어 그게 자신의 목숨에 대한 위협이라고 하더라도, 거기에 대한 미련과 집착이 사라지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아. 아.. 인생 별 거 없구나.

    노자 도덕경의 위자패지, 집자실지(爲者敗之, 執者失之 - 자꾸 집착하면 더욱 그르칠 뿐이요, 자꾸 잡으려고 하면 더욱 놓치게 될 뿐이다)에서 말하고자 했던 그 무엇. 성경에서 말하는 알파와 오메가,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몸으로 체험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따지면 삼장법사의 컨닝페이퍼도 결국 그것을 설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일부분일 뿐이고, 인간이 무슨 짓을 하던 간에 세상은 다만 그 자체로 아름답게 돌아간다는 것. 그러고보니 비슷한 말을 성철 큰스님도 남겼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구나.



    화해의 시간(2010) : 이근은



    *

    세상은 다만 흐를 뿐이고 인간은 그 안에서 살아나갈 따름이며, 슬프고 즐거운 희로애락은 잠시 한 순간의 꿈에 불과할 수 있다는 깨달음. 얼핏 생각하면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그러한 깨달음의 뒤에는 이미 거쳐왔던 뼈를 깎고 피를 토하는 고통의 과정이 있어 자기 자신의 존재가 강렬하게 확립되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가 존재하는 이상 그것이 비록 허무하더라도 진정으로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고통의 과정없이 그냥 머리만 데굴데굴 굴려 결론을 허무시리즈로 도출한 사람은 꼴 사나운 삼류 허무주의에 빠져들게 되지만, 죽어라 고생해 가며 이러한 결론을 몸으로 체득한 사람. 곧 이근은과 같은 경우라면 오히려 그럼으로서 낙담하지 않고 그 안에서 올바르게, 그야말로 흐르는 듯이 살아나갈 수 있는 동력을 찾아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마 그것이 바로 이근은의 그림을 지탱하는 예술혼과 정신의 본체이자 아우라의 정체일 텐데, 이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자연스럽게 설명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이렇게 되면 감성이 은실처럼 예리해 지면서 주변의 아주 작은 무언가에도 감명을 받아 무언가를 느끼게 되고, 그 주체가 예술가일 경우 그것을 그리거나 노래함으로서 그 깨달음을 관객과 함께 공유하려는 의지가 강해진다.

    그래서 주변의 소소한 사물을 그려내기 시작한 이근은의 자연주의가 그의 화폭에 안착한 것은 아마 이 때부터일 가능성이 높고, 그가 스스로를 자연주의 작가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 역시 아마 이때부터일 공산이 큰 것이다.



    이 세상 아름다와라 (2005) : 이근은



    애국가를 듣다보면 가을하늘 공활한데.. 어쩌고 하는 가사 문구가 등장한다. 하지만 우리 중 과연 몇 사람이나 진정으로 모든 것을 훌훌 벗고 그 공활한 하늘을 마주할 수 있었을까.

    인간이 집착과 사심을 최후의 반 톨마저 버리는 순간, 자연은 우리 앞에 그 본체를 드러내어 알량한 일개 인간으로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자태를 과시한다. 나이아가라 폭포의 경치가 좋다고 자연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자연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받아들일 수 있을만큼만 받아들여 화폭에 펼침으로서 어떻게든 나누고자 하는 예술가의 행위는 장님의 코끼리 더듬기와 별 다를 바 없는 행위에 불과한 것인데, 사실 이 코끼리는 꼬리조차 아름다운 거다.

    수많은 수행자들이 꿈에서라도 더듬어 보기를 바라는 그 코끼리, 지고의 아름다움으로 존재하며 영원을 노래할 수 있는 그것. 이근은의 그림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체불명의 아우라는 바로 무상(無上)의 코끼리 다리에서 더듬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우연일 뿐일까. 아예 대놓고 코끼리를 숭배하는 종교도 있다.

    *

    그가 겪었던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어지간한 사건이라도 시간이 지나 과거지사로 묻혀져가면 세월 속의 인간은 그것에 대한 두려움을 어느 정도 지워 놓게 된다. 기억조차 아프지만 이제 더 이상 닥쳐올 일이 없으니 그런 것이다. 그래서 가끔 다시 돌이켜보는 일도 벌이곤 하는데, 이근은 역시 그것을 슬며시 들춰보고는 다시 덮어버렸다.

    그의 그림 중 하나에 그것이 표현된 것이 있는데, 그것까지 여기 붙여놓기엔 너무 잔인할 수도 있으니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직접 찾아보기 바란다. 물론 작가과 원수관계를 맺기 싫은 사람이라면 그걸 굳이 이야기까지 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

     


    소설 서유기에서는 천축에서 돌아와 각자 해탈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삼장법사에게는 거기가 끝이 아니었다. 그는 천축에 다녀온 뒤부터가 사실 진정한 생고생의 시작이었던 거다.

    산스크리트어로 적힌 경문을 그냥 가져다 놓으면 까막눈이 널린 그 시절 도대체 몇 명이나 그것을 읽을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밤을 낮삼아 경문번역에 매진했는데, 번역작업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은 다들 동의하겠지만 제대로 하면 이것도 코피 터질 일이다. 하여간 삼장법사가 그때 번역한 천축의 경전 가운데 하나가 바로 대반야바라밀다경.

    하지만 귀찮아서 그러셨는지 아니면 힘들어서 그러신 건지 경전을 확 줄여서 요점만 정리하여 전체 270자 문구로 만드시고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라 명명하셨는데, 그 덕분에 경문의 독해 난이도가 확 올라가 버리고 말았다. 쉬운 말로 해탈 시험의 컨닝페이퍼 정도가 세상에 등장한 거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 시..(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 時..)로 시작하는 불경. 어려운 한문 나왔지만 생각보다 어려운 건 아니다. 반야심경은 누구나 한번 쯤은 이 경전의 글귀를 들어보았을 정도로 유명한 경전인데, 예를 들어 아제아제 바라아제라는 영화의 제목은 바로 이 반야심경의 마지막 종장에 등장하는 글귀이고 무슨 에로영화 제목같은 색즉시공 역시 이 경전의 키포인트를 이루는 문단 중 하나다.

    물론 이걸 보고도 해탈할 수는 있지만 그냥 공부하고 말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은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 얼추 예습하고 들어가지 않으면 애매하기 짝이 없다. 아니 불(不)자가 전체 270자 가운데 무려 9회, 없을 무(無)자는 21자, 빌 공(空)자는 7회 열거되었다.

    본문을 읽어보면 무엇은 무엇이다는 식의 표현은 거의 없는 대신 무엇은 무엇이 아니고, 심지어 그 무엇조차 없는데 사실은 그것조차 아니로다 식의 낙동강 오리알 투성이다. 관자재보살께서 행심바라반야밀다 하실 적에 뭘 잘못 드셨나, 왜 이렇게 쓰셨을까.

    반야심경이 이렇게 골 아프기 짝이 없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상상하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훨씬 방대한 내용이 압축되어 있는데, 우등생의 컨닝페이퍼는 원래 분량이 작을 수록 더 어려운 법.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인지라 산에서 수도하며 공부하는 구도자가 아닌 바에야 그걸 제대로 알아내려면 어떤 계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어떠한 계기를 통하여 그것을 알아내게 되면 이른바 달관(達觀) 내지는 통달(通達)이라는 것이 보상으로 주어지는데, 이제 이야기하려는 작가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그만 달관해 버린 예술가이다. 달관당했음을 사방에 드러내는 것을 보니 그의 깨달음은 아직 진정한 의미의 해탈과는 거리가 멀다 할 수 있지만 어차피 예술이란 곧 자랑질. 즉 표현이므로 일면 당연한 노릇이 아닐까.

    그, 바로 이근은이다.



    그래, 가끔은 작업실에 놀러와 (2009,02-창원 아시아 미술제) : 이근은



    우선 이근은은 태생적인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니다. 그는 현직 순수예술가이고, 그의 순수예술작업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그에게 있어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의 경계는 비교적 뚜렷하기에 단편적인 이해는 어렵지 않다. 순수예술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골라낸, 비교적 잘 팔릴 것 같은 그림들이 일러스트레이션의 포트폴리오로 옮겨진 것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단면도를 잘라놓고 전체를 얼버무리기에는 그의 그림에서 풍겨오는 기이한 아우라를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역시 그의 일러스트레이션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정신적 깨달음. 즉 이근은식 예술의 동력 구조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해 보려 해야 한다.

    *

    얼마전 타계한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어울리지도 않는 흰옷을 고집스럽게 일관한 이유는 그의 어린 시절 어머니가 풀을 먹여 다려주었던 흰 옷, 즉 삶의 기억이 그의 마음 깊은 곳에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작가가 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더라도 그려낼 수 있는 모든 것의 기준은 결국 스스로의 삶, 단지 그것 뿐인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의 삶이라는 것은 또한 롤러코스터의 연속이다.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가 있고, 바닥을 칠 때가 있으면 별을 딸 수 있을 정도로 오를 날도 있는 법. 순수예술에서 스스로의 삶을 노래할 때에는 이 모든 것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연작' 같은 것을 만들어내어 관람하는 사람에게 동감과 감동을 줄 수 있지만, 상업예술에서는 아무래도 그럴 수 있는 여지가 많이 좁은 편이다.

    대중은 롤러코스터의 아래로 처박히는 것을 그다지 즐기지 않기 때문이다.



    자화상 - 불안 (99) : 이근은



    이근은의 순수예술작품 가운데 하나인 '자화상'이다. 절대 즐거워보이지 않는 남자가 불안 속에서 두려워하고 있다. 두려움의 대상이 무엇일까. 죽음일 것 같지만 그건 아닐 것이다. 조금이라도 죽음에 직면해 본 사람은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죽음으로서 다가올 고통, 즉 남겨질 자의 아픔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사실 이 그림을 개별적으로 보자면, 나는 이근은의 그림 가운데 그저 그런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특출난 기교도 보이지 않고, 이 정도 수준으로 불안과 그것에서 기인하는 공포를 묘사하는 작가는 널리고 깔렸기 때문이다. 사실 이렇게 대놓고 묘사하지만 않을 뿐이지, 현대 사회에서 이 정도 불안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여기서 놓치기 쉬운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것을 그릴때만 해도 이근은의 그림에 아직은 어떠한 달관한 자의 깨달음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두려움은 그에게 있어 어떠한 깨달음을 줄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할 수 있다. 보통 멀쩡한 사람을 달관시켜버리는 계기는 흔히 가슴 저미는 공포와 고통의 과정이기 쉽기 때문이다.



    구토(99) : 이근은



    불안 다음에 나타난 것은 구토현상이다. 그가 두려워하던 최악의 사태, 그 임팩트의 순간은 고의적으로 연작의 극적 효과를 위해 생략한 것인지 아니면 차마 그려내지 못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큰데, 이 구토 현상이 두려움의 본체가 그의 삶에 닥쳐오기 전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고 예측할 수 있는 이유는 고통을 호소하는 이런 류의 고난 시리즈 후에 바로 침묵 속의 응시, 즉 묵시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묵시에서부터 그의 그림에서 옅은 현기의 후광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묵시 (2000) : 이근은



    그 역시 자책과 자학의 유혹에 시달리기도 했다는 것은 별로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광야에서 고행하던 예수도 피해가지 못했던 그것이 바로 자기학대의 유혹이니까. 이런 자책에 빠지면 그 다음은 굴복과 자기혐오로 발전하기 마련이고 정신은 나락으로 떨어져 건전한 삶이 어려워지지만, 이근은은 그것을 돌파해 냈다.

    그때 그가 그것을 돌파하는데 사용한 것이 바로 겸허다.



    빗소리 (2000) : 이근은



    그는 모든 것을 벗어던진채 겸손한 자세로 스스로를 수그리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 애썼고, 그러한 퀘스트의 보상 아이템으로 무언가 중요한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그가 찾아낸 것이 바로 달관의 동력, 그의 예술을 발광시키는 아우라의 본체이다.



    빛이 스며들다 (2002) : 이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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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녀의 성비율이 다르긴 하지만 하여간 교수대에 오르는 죄수 가운데 난동을 부리며 1초라도 더 살아보려고 발악하는 죄수의 비율은 채 1%도 안된다는 통계를 참조하자. 가장 낮은 곳에서 더 이상 지킬 것 없는 자가 스스로 취할 수 있는 가장 겸허한 자세로 다가드는 모든 것을 수용하려는 순간, 그는 속세를 살아가는 필멸자로서 중요한 것 한 가지를 버리게 된다. 바로 집착, 혹은 미련이다.

    심지어 그게 자신의 목숨에 대한 위협이라고 하더라도, 거기에 대한 미련과 집착이 사라지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아. 아.. 인생 별 거 없구나.

    노자 도덕경의 위자패지, 집자실지(爲者敗之, 執者失之 - 자꾸 집착하면 더욱 그르칠 뿐이요, 자꾸 잡으려고 하면 더욱 놓치게 될 뿐이다)에서 말하고자 했던 그 무엇. 성경에서 말하는 알파와 오메가,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몸으로 체험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따지면 삼장법사의 컨닝페이퍼도 결국 그것을 설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일부분일 뿐이고, 인간이 무슨 짓을 하던 간에 세상은 다만 그 자체로 아름답게 돌아간다는 것. 그러고보니 비슷한 말을 성철 큰스님도 남겼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구나.



    화해의 시간(2010) : 이근은



    *

    세상은 다만 흐를 뿐이고 인간은 그 안에서 살아나갈 따름이며, 슬프고 즐거운 희로애락은 잠시 한 순간의 꿈에 불과할 수 있다는 깨달음. 얼핏 생각하면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그러한 깨달음의 뒤에는 이미 거쳐왔던 뼈를 깎고 피를 토하는 고통의 과정이 있어 자기 자신의 존재가 강렬하게 확립되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가 존재하는 이상 그것이 비록 허무하더라도 진정으로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고통의 과정없이 그냥 머리만 데굴데굴 굴려 결론을 허무시리즈로 도출한 사람은 꼴 사나운 삼류 허무주의에 빠져들게 되지만, 죽어라 고생해 가며 이러한 결론을 몸으로 체득한 사람. 곧 이근은과 같은 경우라면 오히려 그럼으로서 낙담하지 않고 그 안에서 올바르게, 그야말로 흐르는 듯이 살아나갈 수 있는 동력을 찾아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마 그것이 바로 이근은의 그림을 지탱하는 예술혼과 정신의 본체이자 아우라의 정체일 텐데, 이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자연스럽게 설명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이렇게 되면 감성이 은실처럼 예리해 지면서 주변의 아주 작은 무언가에도 감명을 받아 무언가를 느끼게 되고, 그 주체가 예술가일 경우 그것을 그리거나 노래함으로서 그 깨달음을 관객과 함께 공유하려는 의지가 강해진다.

    그래서 주변의 소소한 사물을 그려내기 시작한 이근은의 자연주의가 그의 화폭에 안착한 것은 아마 이 때부터일 가능성이 높고, 그가 스스로를 자연주의 작가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 역시 아마 이때부터일 공산이 큰 것이다.



    이 세상 아름다와라 (2005) : 이근은



    애국가를 듣다보면 가을하늘 공활한데.. 어쩌고 하는 가사 문구가 등장한다. 하지만 우리 중 과연 몇 사람이나 진정으로 모든 것을 훌훌 벗고 그 공활한 하늘을 마주할 수 있었을까.

    인간이 집착과 사심을 최후의 반 톨마저 버리는 순간, 자연은 우리 앞에 그 본체를 드러내어 알량한 일개 인간으로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자태를 과시한다. 나이아가라 폭포의 경치가 좋다고 자연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자연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받아들일 수 있을만큼만 받아들여 화폭에 펼침으로서 어떻게든 나누고자 하는 예술가의 행위는 장님의 코끼리 더듬기와 별 다를 바 없는 행위에 불과한 것인데, 사실 이 코끼리는 꼬리조차 아름다운 거다.

    수많은 수행자들이 꿈에서라도 더듬어 보기를 바라는 그 코끼리, 지고의 아름다움으로 존재하며 영원을 노래할 수 있는 그것. 이근은의 그림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체불명의 아우라는 바로 무상(無上)의 코끼리 다리에서 더듬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우연일 뿐일까. 아예 대놓고 코끼리를 숭배하는 종교도 있다.

    *

    그가 겪었던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어지간한 사건이라도 시간이 지나 과거지사로 묻혀져가면 세월 속의 인간은 그것에 대한 두려움을 어느 정도 지워 놓게 된다. 기억조차 아프지만 이제 더 이상 닥쳐올 일이 없으니 그런 것이다. 그래서 가끔 다시 돌이켜보는 일도 벌이곤 하는데, 이근은 역시 그것을 슬며시 들춰보고는 다시 덮어버렸다.

    그의 그림 중 하나에 그것이 표현된 것이 있는데, 그것까지 여기 붙여놓기엔 너무 잔인할 수도 있으니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직접 찾아보기 바란다. 물론 작가과 원수관계를 맺기 싫은 사람이라면 그걸 굳이 이야기까지 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

     

     

     


     

    illustwriter
    대남

    1998년 보르도 5대학 D.E.F.L.E
    2000년 파리 발라드 오디오 비쥬엘 상급 예술학교(ESRA-Paris Balade)
    2003년 파리 8대학 조형예술학과 Art Plastique, Universite Paris 8e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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